아티스트라는 신기루

홍이지(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정재연은 불현듯 과거에 부모님과 방문했던 옛 국립중앙박물관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기억 속에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웠던 근대 건물의 모습을 재현해보고 싶었다. 조선총독부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건물로 일제의 식민지배 당시 조선총독부의 청사였다. 정재연이 기억하는 건물의 모습은 전두환 정부에서 이 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축한 이후의 기억이다. 1995년 당시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하였고 이제 이 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과거 조선총독부 건물이 함의하는 상징성, 과거의 기록과 장소성, 한국 사회와의 관계성에 집중하게 되는 한편, 건물이 가진 역사와 특수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당시, 건물 그 자체가 전해줬던 아름다움을 탐닉하던 어릴 적 자신의 미감을 기억한다. 정재연은 이러한 자신의 기억을 통해 과거와 강력하게 이어져 있는 선형적 시간성과 자신 안에 고스란히 각인된 미감과 취향에 대해 새삼 확인한다.

작가는 오랜 해외 레지던시 경험과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동양철학과 동양 미술사보다 서양 미술사와 서양 철학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또한, 동시대성을 취득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해야 한다는 그의 미래지향적 관점은 과거를 금기시하는 일종의 관습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시대성은 최근 불거진 여러 정치 사회적 스캔들과 함께 원칙이 사라지고 붕괴된 사회를 통해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얼마나 단단하고 강력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과거의 자신을 추적하는 것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의 시작임을 인지하게 된다.

다시 찾은 모교의 스튜디오에서 정재연은 다시금 새로운 공간과 환경에 익숙해지기 위한 방법론을 찾는다. 과거 영국 플로렌스 트러스트에서 낯설고 막연한 상황에 적응하고자 매일같이 출근하고 수련하는 마음으로 시멘트 블록들을 만들었던 <7일 24시간 7/24>(2011-12)처럼 새로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판화 프레스기를 발견한 후, 막연하게도 옛 국립중앙박물관의 잔상을 그려내고 이 프레스기로 눌러 찍어내고자 결심한다. 생각해보면 정재연은 늘 새로운 방식과 형식, 조형적 실천을 선보여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Retrace>(2017) 역시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규칙과 반복적인 육체적 ‘노동’의 굴레로 밀어 넣고. 손에 익지 않은 방법과 기술을 반복함으로써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아마추어이자 비기너로 포지셔닝하고 반복적으로 판화기술을 익혀나가는 과정은 그가 생각한 아티스트로서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금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고 분석하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미감에 대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새삼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어렸을 적 좋아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자신의 취향과 미감을 반영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기억해내고, 본뜨고, 그려 겹쳐내고 그 기억을 켜켜이 쌓아 올렸다. 판화라는 기법을 택한 것은 작가가 취한 아마추어 비기너의 포지션에서 반복과 습득을 통해 발전하는 과정을 작업에서 드러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존재가치와 시간의 축적이 가지는 힘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의 제목 <Retrace>(2017)는 그림을 본떠 그린다는 의미 외에도 과거를 추적한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고 발견하는 여정은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자신의 도서대출 목록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도서관 시스템에 남아있는 그의 도서목록은 과거의 자신의 취향과 선택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서양미술사와 서양철학을 탐닉하던 과거 20대 초반의 자신과 인문학, 역사, 건축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도서목록 리스트는 당시 정재연의 관심사와 작품과 맞물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작가는 익명성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노출시킴으로써 아티스트 자아를 형성해나간다. 자신을 분리하고 대상화하여 자신의 근간을 좇는 정재연의 과정은 그렇기에 중요하고 흥미롭다.

이러한 정재연의 방법론은 전시를 관람하는 타인보다 작가가 스스로를 탐구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번 전시가 작가 자신의 미감과 취향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에게 있어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심미적 가치는 이러한 축적된 과거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붙잡기 힘든,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